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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수의 플레이리스트 - 음악에서 음악으로


 토크쇼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에서 유희열은 ‘음악의 힘은 지표식물처럼 인생의 한 스냅샷을 꺼내 주는 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또 다른 패널 다니엘 린 데만은 ‘독일 록밴드 스콜피언스의 ‘윈드 오브 체인지(Wind of change)’는 독일인들에게 독 일 통일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인 노래’라고 했고, 김중혁 작가는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을 들으면 신촌 레코드 가게 앞이 떠오른다’고 했다. 어쩌면 음악은 꽤나 많은 것들을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저장해두는 힘을 가진 걸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 그 곡을 즐겨 듣던 당시에 주로 했던 고민들부터 아주 짧은 순간에 스쳐 갔던 감정들까지도.

 그래서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받을 때에는, 그의 생활 아주 작은 조각들도 함께 공 유 받는 것 같아 가끔은 괜히 조심스럽고, 나 혼자만 비밀스럽다. 물론 내가 엿본다고 느끼는 그 생활들마저도 결국 아주 단편적인 부분들에 그칠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플레이리스트 엔 주인의 취향 같은, 꽤나 의미 있는 것들이 담겨 있다고 막연히 확신한다.


사진 출처: <EBS 라디오 정세운의 경청> 공식 인스타그램

사진 출처: <EBS 라디오 정세운의 경청> 공식 인스타그램

 가수 정세운이 최근 라디오 DJ를 맡았다. 일요일의 끝자락을 담당하는 <EBS 라디오 정세운의 경청>의 DJ, 일명 ‘센디’로 열활 중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방송에서는 ‘싱어송라이돌 세 운이가 추천하는 Song’이라는 귀여운 의미가 담긴 주간 코너 ‘싱송셍송’이 진행됐다. 덕분에 청취자들은 센디의 추천곡들을 연달아 한 시간 가까이 들을 수 있었고, 그 시간이 팬으로서는 특히 더 즐거웠다. 가끔 한 곡씩 추가되는 플레이리스트도 일상의 소소한 기쁨 중 하나지만, 한 번에 많은 곡이 추가되는 날엔 들을 노래가 많아서 기쁨도 두 배다. 심지어 오로지 추천곡을 위해 만들어진 코너였으니 곡에 담긴 소소한 사연이나 추천 이유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Corinne Bailey Rae 공식 사이트

 라디오를 들었던 날엔 이 플레이리스트의 첫 번째 곡이 문득 궁금해져 스크롤을 내리다 밤 새 옛날 영상들을 돌려 보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Corinne Bailey Rae의 ‘Put Your Records On’을 커버하는 영상을 좋아한다. 그가 출연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막을 내리고, 지금의 정 세운 팬덤 ‘행운’이 ‘포뇨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포뇨’의 데뷔를 기다리던 즈음이었다. ‘내 픽이야’로 소개했던 때를 지나 이젠 ‘내가 좋아하는 가수야’로 소개하게 된 것에 괜히 뭉클해하던 시기였고, 그래도 데뷔 전이었기에 떡밥이 모자라서 사진 한 장도 아껴 보았던 때였을 것이다. ‘Put Your Records On’은, 그때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첫 번째 곡이다. 이처럼 설렘 가득한 스냅샷들을 담은 곡이라 이 곡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사진 출처 : 1theK(원더케이) 공식 트위터

‘Go put your records on tell me your favourite song You go ahead let your hair down Sapphire and faded jeans I hope you get your dreams Just go ahead let your hair down You’re gonna find yourself somewhere somehow’ - Corinne Bailey Rae, ‘Put Your Records On’ 중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구절은 대개 시련과 고난 뒤에 붙는 방식으로 쓰인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전부 지나가는 것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기쁨 같은 건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고 들뜨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정보를 접했 을 때는 사연이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런데 데뷔곡으로 공중파 음악 방송 1위 후보로 올랐던 날, 많은 축하 속에서 짓던 평온한 표정과 기쁘지 않냐고 물어오던 여러 스태프들에게 둘러싸 여 정말 기쁘다며 다급히 박수를 치던 모습을 보고 알았다. 후에 한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다 지나간다’고 생각해서 너무 들뜨지도 너무 좌절하지도 않는다는 나름 넓은 의미의 좌우명이었다는 걸 말이다.


사진 출처 : John Mayer 공식 인스타그램

정세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걸 고르라면 캐릭터 ‘포뇨’ 다음으로 ‘푸딩’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기타를 고를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방송에 얼굴을 비췄던 <K팝스타 시즌3>에서도 내 내 기타를 메고 있었으니 어쩌면 가장 친숙한 모습일지도. 그리고 그즈음, 그가 기타를 메게 된 운명적인 순간에는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John Mayer가 있었고, 그는 JohnMayer의 음악들을 꾸준히 그리고 많이 추천해왔다. 노래보다 기타를 우연히 먼저 접했다는 정세운은 이 가수의 라이브 영상을 보고 막연하게 꿈을 키웠다고 했다.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John Mayer의 많은 노래들 중, 화려한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곡 ‘Neon’을 좋아한다.



 나른하고 차분하며 꽤나 무던한 성격의 사람에게 붙는 편견이란, 감정 기복이 적은 만큼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며 살 거라는 추측이다. 그래서였는지 콘서트나 방송을 통해 종종 열정 적인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또 성실한데 게으르고 게으른 데 성실해서 붙여졌다는 ‘성실한 베짱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도, 마냥 여유만만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왠지 ‘성실함’보다 ‘베짱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사실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퉁기고 있을 것 같은 모습 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젠 뒤로 감춰졌던,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던 꾸준함과 성실함, 열정과 욕심을 그의 음악과 무대로부터 발견하곤 한다. 그런 면모는 ‘Neon’의 화려한 기타 연주와도 참 닮았다.


 최근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라는 제목의 콘서트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내가 위로받고 좋아했던 음악들이 누군가에 의해 공유가 되었을 때, 아티스트가 위로받고 좋아했던 음악들이 사랑하는 팬들에게 공유되었을 때. 그때만큼 행복하고 내 감정을 전달하는 순간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콘서트. 따뜻한 순환인 거라 생각한다. Corrine Bailey Rae의, John Mayer의 노래를 들으며 꿈을 찾고 위로를 받던 가수는, 같은 곡으로부터 비슷한 위로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자신의 목소리로 하여금 위로받는다는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어쩌면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는 널리 공유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온전히 그만의 것이 아 니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가수의 플레이리스트’라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곡에 수천 개의 다른 이야기가 담겨 지금도 어딘가를 떠도는 게 음악, 그리고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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