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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라리

케이팝, 장르를 품다


K-POP은 근본적으로 상업적이고 대중지향적인 장르이다. 때문에 아이돌 음악은 귀에 쏙쏙 박히는 쉽고 직관적인 멜로디의 버블검 팝이나 셀링 포인트를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후크송 등의 형태로 진화하며 보편성을 좇아 왔다. 그러나 씬의 파이가 커지고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며 K-POP은 점차 일반적인 메인스트림 대중가요의 형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문법들을 빌려 오기 시작했고, 2020년은 그 양상이 가장 두드러진 한 해였다. 본 글에서는 올해 성공적으로 장르음악과 K-POP을 결합시켰던 인상적인 트랙들을 소개한다.


 

SUGA, [D-2], 빅히트엔터테인먼트, 2020


[ 국악 ] 슈가, '대취타'


우리가 방탄소년단(BTS)의 성공에 '국뽕'을 느끼는 것은 비단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가 된 그들이 여전히 국제 무대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지속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예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탄소년단은 단순히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한국 출신의 보이밴드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어제를 오늘의 언어로 노래하여 새로운 내일을 만드는 범문화적 인플루언서이다. 마침내 빌보드 1위라는 정상의 자리를 거머쥔 2020년에도 그들의 아이코닉한 행보는 계속되었는데, 멤버 슈가(SUGA)의 솔로 믹스테이프 [D-2]의 타이틀곡 '대취타'가 바로 그렇다. '대취타'란 조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국악 행진곡으로, 임금이 거둥하거나 군사 의식이 있을 때 으레 연주되어 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도 울려퍼졌을 만큼 유서 깊은 군례악이다. 슈가는 이 '대취타'의 이름을 빌려 온 솔로곡에서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징을 한번 울려 대취타를 시작하라)라는 고유 도입부를 시작으로 국악을 샘플링한 비트 위에 차진 랩을 얹는다. 이어 음악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에서도 노란 철릭과 남색 허리띠의 취타대를 동원하여 전통 문화의 멋을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대취타'는 현재 유튜브에서 1.7억 회의 스트리밍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덩달아 대취타의 유래를 설명하는 국립국악원의 콘텐츠마저 국내외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슈가가 던진 화두가 점차 더 넓은 영역으로의 반향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3년 '하여가'에서 태평소 가락을 샘플링한 이후 27년 만에, 가요계는 다시 국악이라는 화두를 마주했다. 그러나 국악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하며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받고 있는 크로스오버 밴드 잠비나이이날치와는 달리, '명금일하대취타'라는 외침으로 뮤직비디오의 포문을 연 정재국 명인이 '제목만 대취타일 뿐' 이라고 지적했듯 '대취타'의 사운드가 그 자체로 크게 혁신적인 성과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메인스트림의 최전선에 선 아티스트가 한국 대중가요계의 중심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의 주목 앞에서 지속적으로 한국 문화의 변용을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대한 상징성을 가진 행위다. 높아진 위치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등에 지고 스스로 문화적 화두를 던지는 방탄소년단이 만들어 나갈 산뜻한 물결을 기대해 본다.


드림캐쳐, [Dystopia : Lose Myself], 드림캐쳐 컴퍼니, 2020


[ 록 ] 드림캐쳐, 'BOCA'

드림캐쳐 컴퍼니(前 해피페이스엔터)는 2009년에 설립되었으나, 유의미한 기획 실적은 2011년에 데뷔시킨 달샤벳 정도에 그쳤고 그 달샤벳마저도 크고 작은 부침을 겪으며 험난하게 커리어를 이어 왔다. 그런 면에서 2014년 데뷔한 밍스(MINX)가 2년 만에 해체라는 결말을 맞게 된 것은 그리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 전개다. 그러나 훗날 밍스의 멤버 5인에 한동과 가현을 추가해 재데뷔한 걸그룹 드림캐쳐는 씬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힐 만큼 유니크한 음악과 독창적인 기획으로 초동 3만 7천 장을 기록하는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K-POP의 오랜 역사를 돌아 봐도 이만큼 극적인 서사를 가진 아티스트는 찾아 보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스토리다. 이렇다 할 팬덤도, 선배 그룹의 지원사격도 기대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무명 그룹 드림캐쳐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음악의 힘이다. 작곡을 도맡아 온 Ollounder와 LEEZ는 K-POP에 록과 메탈을 결합시키며 K-POP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이 강렬한 음악이 비장한 판타지풍의 세계관과 맞물리며 드림캐쳐라는 팀은 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유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허나 드림캐쳐 컴퍼니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대표곡 'Chase Me' 나 '데자부' 같은 정통 록 넘버의 잠재적인 매너리즘을 탈피하고자 기존의 음악색에 일렉트로니카의 물감을 빌려오는데, 그것이 2020년 발매된 'Scream'과 'BOCA'이다. 다섯 번째 미니앨범 [Dystopia : Lose Myself]의 타이틀곡 'BOCA'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연상시키는 기존의 묵직한 록 사운드에 EDM 장르인 뭄바톤의 문법을 더해 변주를 준 곡이다. 벌스에서는 록의 흔적을 지우고 뭄바톤 리듬으로 이목을 잡아끌더니 후렴에서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파워풀한 일렉트릭 기타 리프를 선보인다. 보이스 샘플과 퍼커션이 위태롭게 무드를 고조시키다 갑작스레 강렬한 록 사운드로 전환되는 곡의 구조가 폭력과 혐오로 물든 언어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이끈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담은 앨범의 주제의식을 연상시킨다. 독자적인 장르 노선을 구축한 데 이어 지속적으로 음악적 영역을 넓혀 나가고, 이 과정을 독특한 세계관과 함께 음악 내에서 자연스럽게 풀어 나간다는 점에서 드림캐쳐와 드림캐쳐 컴퍼니의 행보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움을 선사하고 있다. 장르적 색채가 너무 짙어 완전히 주류로 올라오기는 어려운 음악일 지 몰라도, 'K-POP에는 이런 그룹도 있다'고 세계 무대에 자랑할 수 있는 팀 중 하나가 바로 드림캐쳐임은 분명하다.


유키카, [서울여자], 에스티메이트, 2020


[ 시티팝 ] 유키카, '서울여자'


70~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기 나타난 시티 팝(City Pop)은 사실 독자적인 음악 장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의 AOR(Adult-Oriented Rock)의 영향을 받아 스무드 재즈, 펑크, 디스코 등 여러 장르를 섞어 만든 음악 사조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티팝이 가지고 있는 '쿨'하고 '힙'한 감성-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처럼-은 분명히 다른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티팝만의 매력이었고, 알음알음 입소문을 탄 끝에 2017년 무렵부터 한국에서도 다시금 시티팝 매니아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백예린이 시티팝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미니앨범 [Our love is great]의 타이틀곡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로 멜론 차트 최상단을 정복한 2019년에 이르러서는 시티팝은 '비주류 음악 중에 가장 주류인 음악' 정도의 포지션으로까지 올라오게 된 듯 보인다. 그 흐름을 타고 K-POP 씬에도 본격적인 '시티팝 가수'가 등장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프로젝트 걸그룹 '리얼걸 프로젝트'와 JTBC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믹스나인> 출신의 일본인 솔로 아티스트 유키카다. 유키카는 K-POP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시티팝 장르를 메인으로 내세우며 등장했고, 일관된 음악 노선과 우수한 퀄리티에 힘입어 데뷔 이후 발매한 두 싱글 '네온'과 '좋아하고 있어요'가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매니아층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다양한 웹 예능에서의 활약으로 인지도를 본격적으로 끌어올린 다음 유키카는 2020년 첫 번째 정규앨범 [서울여자]를 발매하게 된다.


동명의 타이틀곡 '서울여자'는 우리가 그녀에게 원하는 바를 정확히 구현하는 훌륭한 트랙이다. 시작하자마자 꽉꽉 채운 시티팝 사운드가 내달리고, 적절히 배치된 악기와 백그라운드 보컬이 벌스의 빈틈을 촘촘하게 메꾸며 트랙을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리버브를 잔뜩 먹여 '서울여자'를 외치는 후렴 사이로 아련한 신디사이저가 치고 들어오는 정석적인 구성에 더해 다양한 변주를 동원하여 드라마틱하게 곡을 전개하는 세련된 프로듀싱이 돋보이는 '서울여자'. 유키카라는 이름을 또렷이 각인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는 웰메이드 트랙이다. K-POP의 영역에서 시티팝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해 낸 어엿한 '서울여자' 유키카의 활약으로 2020년의 K-POP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졌다.


유아, [Bon Voyage], WM엔터테인먼트, 2020


[ 월드뮤직 ] 유아, '숲의 아이'


조금 과장을 보탠 수식어일 수도 있지만, 2020년은 오마이걸의 해였다. 4월 발매된 미니앨범 [NONSTOP]의 타이틀곡 '살짝 설렜어 (Nonstop)'이 예상 밖의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팀 커리어 최초의 음원 차트 1위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수록곡인 'Dolphin'이 서서히 입소문을 타더니 종내에는 '살짝 설렜어'를 뛰어넘는 그룹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K-POP 역사상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한 수록곡 중 하나로 회자될 'Dolphin' 이후 팀의 위치는 과거와는 너무나도 달라졌지만, 오마이걸과 WM엔터테인먼트가 데뷔 이래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이어 온 '좋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도전 정신만큼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멤버 유아의 솔로 데뷔 앨범 [Bon Voyage]와 그 타이틀곡 '숲의 아이' 때문이다. 유아는 몽환적인 비주얼과 뛰어난 댄스 실력으로 주목받은 멤버로, 그녀가 솔로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대부분은 [Bon Voyage]의 수록곡 '자각몽 (Abracadabra)'처럼 쿨한 무드의 댄스곡이나 소속 그룹 오마이걸과 비슷한 음악색의 곡을 선보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유아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가지고 왔다. 바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민족음악을 일컫는 월드뮤직(World Music)이다. 몽환적인 플럭 사운드와 풀피리 소리로 시작된 '숲의 아이'는 간단한 악기 구성과 다채로운 퍼커션으로 서서히 무드를 끌어올리다 후렴에 이르러 정글 리듬으로 변주를 주며 아프리카 부족풍의 코러스를 등장시킨다. 이 정도로 월드뮤직의 색깔을 전면에 내세운 K-POP이 지금껏 있었나 싶을 만큼 과감하고 파격적인 시도다. 전례 없이 이국적인 무드의 음악을 조우한 유아는 담백하고 직선적인 가창으로 곡의 콘셉트를 극대화하고 자신의 청아한 음색을 부각시킨다. 이 뛰어난 곡 해석력을 기반으로 선보이는 유아의 보컬과 댄스 퍼포먼스는 컨셉츄얼한 트랙과 맞물려 K-POP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뮤지컬 넘버를 감상하는 듯한 생동감을 연출한다. 우리가 그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제3세계의 음악을 통해 메말라 버린 세계를 구할 열쇠를 찾고자 한 '숲의 아이'의 등장은, 2020년 K-POP의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태민, [Never Gonna Dance Again : Act 2], SM엔터테인먼트, 2020


[ 컨트리 ] 태민, 'Pansy'


2008년 고작 만 15세의 나이로 연예계에 발을 내딛은 태민은 샤이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멤버는 아니었다. 변성기도 채 끝나지 않았을 정도로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린데다, 같은 팀에는 종현이나 민호처럼 음악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존재감이 압도적인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곡 내에서 파트를 10초 분배받기도 어려웠던 그 소년은 5년 후 'Dream Girl'과 'Everybody'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샤이니의 음악적 진보를 견인하게 될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샤이니 최초로 솔로 데뷔를 이루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 낸다.


데뷔 이후 발매된 두 장의 앨범 [PRESS IT]과 [MOVE]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태민은 어느덧 2020년 올해의 남성 솔로 아티스트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그 말대로 의심의 여지 없이, [Never Gonna Dance Again] 연작은 대서사시라는 수식어에 걸맞는 압도적인 볼륨과 퀄리티를 갖춘 앨범이었다. 싱글컷되어 선공개된 트랙 '2 KIDS'는 현란한 퍼포먼스 실력 뒤에 가려진 태민의 매력적인 보컬을 성공적으로 조명했으며, 타이틀 곡 'Criminal'과 '이데아'은 그의 재능을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집대성해 낸 완벽한 마침표였다. 다채로운 테마와 장르를 동원한 앨범의 수록곡 역시 빼어난 리드 싱글들을 받쳐 주며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다.


그 중 [Never Gonna Dance Again : Act 2]의 일곱 번째 트랙 'Pansy'는 웅장하고 화려한 수록곡들 사이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발휘한다. 샤이니의 데뷔일인 5월 25일의 탄생화인 팬지꽃을 제목으로 내걸고 '네 사랑은 하늘보다 기분 좋은 바람을 몰고 왔었'다며 노래하는 이 팬송은 대부분의 파트를 소박한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진행하는데, 이 목가적인 무드와 태민의 담담한 보컬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노랫말에 서서히 젖어들게 되는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기타나 반조 등 평화로운 현악기 사운드와 담백한 멜로디가 특징인 컨트리 장르의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냈기에 그 울림이 더욱 짙다. 일반적인 K-POP의 형태로는 전달하기 어려웠을 감사와 사랑의 감정을 호소력 짙은 컨트리 트랙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 'Pansy', 태민이 걸어온 길을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될, 소박하지만 따뜻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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