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아이돌을 흔히 망돌이라 한다. 나는 갓 신인인 내 최애 아이돌에 대해 “걔 이번에 망했지?”라고 물어오는 친구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이돌 팬덤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고나리자’들 눈치를 보는 습관을 아직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머글인 내 친구처럼, 아이돌 문화에 관심도 없으면서 대충 접한 미디어나 언론의 표면적 이미지만 보고 (혹은 본인의 편견에 갇혀) 유독 아이돌 문화에 대해서만 쉽게 비하하고 단언해버리는 사람들을 ‘고나리자’라 칭하기로 했다.
나는 친구에게 “내 최애 음반 10만 장 이상 팔렸고, 음악방송 1위도 했다”라고 답했다. 친구는 놀라워하다가 다시 되물었다. “근데 대중들이 잘 모르지?”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렇다고 대답하며, “우리 동생도 몰라.”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 최애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무리된 채 다른 화두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하지만 내 최애 화두가 오간 그 잠깐의 10분, 말 몇 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내 최애가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망함과 성공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이 친구가 인디가수나 래퍼들의 음반에도 ‘망했다’는 표현을 이렇게 쉽게 썼었던가.
내 친구가 망했다고 하는 아이돌들은 ‘전 국민이 아는 히트곡’ 이 없다. 여자친구 하면 ‘시간을 달려서’, 트와이스 하면 ‘Cheer up’, 방탄소년단 하면 ‘피 땀 눈물’과 같이 그룹들의 유명한 곡들이 떠오르지만 친구 바운더리 내 망돌들은 ‘자, ㅇㅇㅇ그룹 히트곡 얘기해 봐!’ 하면 3초 컷으로 딱 떠오르는 히트곡이 없는 것이다. 또한 전 국민이 한 소절쯤 모두 알고 있고, 음악방송에서 큰 화제성과 함께 1위를 하고, 음원사이트 실시간 차트 상위권에 머무는 곡들을 보유한 그룹이어야 ‘망하지 않은’ 성공한 그룹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 최애도 그 요건에 미치지 못하기에 내 친구의 망돌 리스트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내 친구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머글들과 심지어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도 흔히 만연해 있는 생각임을 오랜 시간 느껴왔다.
하지만, 내 최애만 보더라도 초동이 9만 장이었다. 갓 신인이 데뷔하고 처음으로 낸 첫 미니앨범의 성과가 이 정도였다. 4월까지의 기록으로는 총 10만여 장을 기록하였으며, 2019년 기획사별 음반 판매 순위 10위를 기록했다. 위아래로는 대형 소속사와 유명 솔로 아티스트, 중소 기획사의 유명 아이돌 그룹들이 자리했다. 음원 순위도 멜*차트 기준 진입 29위로 나쁘지 않았다. 공중파 음악방송에서도 1위를 했으며, 이 정도면 결코 망했다고 볼 수는 없는 실적이다. 그럼에도 망했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내 친구 ‘본인’이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 최애 외에도, 전 국민이 아는 히트곡을 보유하진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앨범을 내고, 음반 실적도 n만장 찍고, 음원 순위도 거진 차트인 하고, 고정 팬덤을 보유하고 있으며, 폭발적인 화제성을 몰지는 못할지언정 케이블 음악방송에서도 1위를 하기도 하면서 수익을 창출해내는 여러 아이돌 그룹들이 있다. ‘고나리자’들이 만든 아이돌 문화에 대한 편협한 시각 속에서 단지 본인들이 모른다는 이유로, 활발히 활동 중인 여러 아이돌 그룹들이 망돌이라는 프레임에 끼워져 멸시당하게 되는 것이다.
유독 아이돌 문화에 대해서 성공과 망함의 기준이 너무나도 쉽게 쉽게 정해지고, 그 성공의 기준치가 지나치게 높다고 느껴지는 바이다. 하지만 흔히 고나리자들이 성공했다고 여기는 아이돌 그룹 (ex. 여자친구, 트와이스, 엑소, 방탄소년단⋯) 들은 성공 중에서도 ‘초대박’이 난 그룹들임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아이돌에 관심도 없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돌 팬들, 즉 아이돌 문화 마니아층들이 즐기고 있는 아이돌 그룹들과 곡들은 훨씬 다양하고 가짓수도 천차만별이니까 당신들이 알고 있는 얕은 정보로 마니아들의 취향을 가벼운 판단으로 업신여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존중과 예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돌은 앨범 하나를 내기까지 짧아야 6개월 정도의 시간을 소요한다. 곡을 수집하고, 타이틀곡 적합 여부를 여러 번 회의하고, 컨셉을 잡고, 곡 녹음을 하고, 안무를 받고, 최종 타이틀이 정해지면 수없이 연습하고, 수정 작업을 거치고, 여러 스탭들과 아티스트의 피 땀으로 일궈낸 소중한 앨범일 것이다. 어느 아티스트의 작업물이 안 그렇겠는가. 그런데 왜 유독 아이돌 그룹이 일궈낸 작업물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음악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않고 “망했잖아”라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심리가 참 무례하다. 그러면서 인디 가수나 타 장르의 곡들은 레어 곡 발견하면 “나만의 곡을 찾았다!” 며 뿌듯해하고 SNS에 자랑스레 업로드한다. 타 장르 아티스트들의 음반 판매율이나 음원 순위로 따지면 그들이 ‘망했다’ 고 말하는 아이돌들의 실적보다 낮은 경우가 많은데, 왜 누군가의 음반은 발견된 ‘보물’이 되고 누군가의 음반은 ‘망돌’ 앨범이 되어야 할까.
꼭 머글들만 아이돌에게 망했다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팬덤 내부에서도 빈번한 일이다. 팬덤과 팬덤 간에 악의적으로 이번 신곡 음원 진입 순위가 저번보다 낮으면 ‘망했다’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팬들 스스로도 본진 차트 진입 순위가 낮으면 스트리밍을 해야 한다며 강요하기도 한다. 아이돌 문화를 향유하는 팬들 사이에서도 아이돌 성공과 망함의 여부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이 음원차트와 음반 판매율인 실정이다. 한 중소 기획사의 걸그룹 팬인 내 친구도 본인의 본진 그룹을 ‘망돌’ 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 걸그룹은 사람들이 이름 들으면 다 알고 있고, 멤버들도 몇몇 유명하고, 주기적으로 앨범 활동을 잘하고 있는 그룹이다. 하지만 팬들이라고 본인의 아티스트를 망돌이라고 깎아내리고 싶을까. 고나리자들이 만들어놓은 망돌의 기준이 너무나 만연하기에 팬들도 분위기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아티스트가 대외적으로 망돌 소리 듣는 것을 원할 팬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이 글은 아이돌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돌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안 가지고는 자유이지만, 아이돌의 성공과 망함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거라면 적어도 관심이라도 가져보고 말을 내뱉었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아이돌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말할 때 말이다. 혼자서는 얼마든지 어떤 그룹이 망한 그룹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목소리가 되어 누군가에 전달될 때 본인 말의 무게에 책임을 졌으면 좋겠다. 아이돌은 엄연히 ‘나’의 취향이고, 장르이고, 마니아층에게 향유되는 문화임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다시 내 최애에 대해, 혹은 아이돌의 실적에 대해 “망하지 않았니?”라고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해주는 건 어떨까. “네가 모르는 거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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