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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엄마에게 아이돌이 생겼다 2 ('믿지'가 된 엄마)

최종 수정일: 2020년 6월 26일


ⓒ JYP 엔터테인먼트


“오구오구오구 귀여워~♡”


간만에 내려간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필자의 귀를 의심케 하는 어머니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필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었다. 어머니께서는 필자의 나이가 이미 스물하고도 여섯이나 지나 아기 때의 무조건적인 귀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며, 이제 보기만 해도 안쓰럽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인지 정체가 궁금해서 안방에 몰래 들어가 보았다. 방문을 여는 소리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어머니께서 빠져 계셨던 것은... 다름 아닌 ‘ITZY’의 V live 방송이었다. 필자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갔는데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시는 것 같아 못내 서운하기까지 했다. 있지가 특별히 웃긴 이야기를 던지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갈 줄 몰랐다. 방 한쪽 벽면에는 어머니께서 집 프린터로 손수 인쇄하셨을 있지의 사진들로 새로이 도배가 막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다... 엄마에게 있지가 찾아왔다.


사실 어머니께서 어떤 가수에 빠지신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대중문화와 거리가 멀었던 어머니는 1994년 9월, 잡지에 등장한 한 아티스트의 의상에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바로 박진영의 ‘비닐바지’였다. 시대를 앞서 가도 너무 앞서가 2020년에 봐도 면역이 안 되고 심지어 가수 본인이 지우고 싶은 흑역사라고까지 얘기했던 그 옷이 어머니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이후 무언가에 홀린 듯, 박진영의 무대 영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려고 하시고 춤도 따라 추셨다고 한다. ‘날 떠나지 마’, ‘그녀는 예뻤다’, ‘Honey’로 이어지는 그의 댄스곡은 막 필자를 낳아 힘들게 육아를 이어나가던 어머니의 플레이리스트 1순위에 있으면서 노동요가 되어주었다.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데뷔시킨 2007년은 어머니께서 K-POP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해가 되었다. <Tell Me>의 강렬한 후크에서 JYP의 선구안에 감탄하셨다고. 원더걸스 이후 데뷔하는 미쓰에이, 2PM, 2AM, 트와이스까지, 타이틀곡과 멤버 구성은 물론이고 각 멤버가 어떤 프로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등의 정보를 줄줄 꿰고 계셨다. JYP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를 시작으로 다른 소속사의 가수들도 찾아보며 발을 넓히기 시작하셨다. 10대와 20대임에도 아이돌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어머니는 마치 스펀지처럼 가수들이 컴백하는 족족 타이틀곡을 흡수하고 계셨다.


ITZY의 두 번째 미니앨범 <IT'z ME> 공식 사진 ⓒ JYP 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있지의 경우 어머니의 그동안의 덕질 양상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2019년 1월 21일 0시에 공개되었던 있지의 데뷔 티저를 당신 혼자 힘으로 찾아보셨던 것이다. 필자가 그동안 알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늦은 2019년이 되어서야 2G폰을 버리고 스마트폰을 장만하셨다. 기계에 대한 적응도 느리시기에, 필자는 어머니께서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하고 검색해서 영상을 찾아보는 일은 1년 정도 뒤에야 가능할 일이라고 여겼었다. 연세도 5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아직 TV에 출연하지도 않은 아이돌은 존재 자체를 알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아이돌의 데뷔 예고를 찾아보실 정도로 아이돌을 좋아하시는지는 상상도 못했었다. 음악중심에 등장한 있지의 ‘달라달라’ 무대를 보시던 어머니께서 멤버 이름을 차례대로 연호하실 때 비로소 입덕을 하셨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암기형’ 팬이었다.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처럼 있지의 역사를 다 외우고 계셨다. 멤버의 생일, 멤버끼리의 라인은 물론이고(라인: 방송이나 V앱 등에서 유독 케미가 도드라져 보이는 두세 멤버를 묶어 이르는 말. 예컨대 있지에서 맏이인 예지와 막내인 유나는 ‘맏막즈’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유나가 예지를 몰이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몇 월 며칠에 어느 프로그램에 나갔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다 기억하고 계셨다. 일 하시느라 바빠서 본방을 못 보시는 날에는 밤을 꼴딱 새면서까지 재방을 챙겨보셨다. 취미에 돈 쓰는 것이 제일 아깝다고 세뇌 교육을 시키셨던 어머니께서 직접 음반 매장에 찾아가 있지의 앨범을 사셨다. 필자에게 충격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이돌의 팬이 되시면서부터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머니의 얼굴은 여태껏 보기 힘들었던 웃음을 흠뻑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필자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는 어머니께 있지를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물어보았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신인답지 않고 프로다운 눈빛과 댄스와 실력에 반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있지를 ‘날치알비빔밥’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미각에 비유하는 걸 즐기신다.) 분명히 한 그룹의 무대를 보고 있는데 멤버 개개인의 매력이 묻히지 않아 각 멤버 중심으로 돌려보면 또 새롭다는 점이 ‘비빔밥’과 닮았으며, 노래는 톡톡 튀기 때문에 ‘날치알’ 같다고 하셨다. 끄덕끄덕하며 수긍하고 있던 찰나, 어머니께서 역으로 필자에게 나중에 있지가 콘서트를 열게 되면 티켓 예약을 해 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셨다. 아무리 젊은 사람들 감각을 따라가 보려고 해도 스피드는 못 따라가겠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언젠가는 필자가 ‘아이돌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좋아해야 아이돌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냐며 당신이 대신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셨다.


콘서트를 가고 싶다고 하실 정도로 있지에 몰입하여 좋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정을 느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자식이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는 건 그동안 서먹서먹했던 모자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단비와 같은 일이다. 또한 필자가 ‘아이돌레’에 소속되어 있어 아이돌 소식을 보다 빠르게 어머니께 전달할 수 있어서, 크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효도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비록 콘서트 티켓팅을 뚫지 못해 어머니의 볼멘소리를 푸지게 듣고 있는 필자의 미래가 그려지지만, 어머니 방의 모든 벽면이 있지의 사진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날까지 필자는 어머니의 덕질을 응원하고 있는 힘껏 도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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