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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진. 이름 그 자체로 SM 음악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6년에 데뷔한 H.O.T.를 시작으로 거의 모든 SM 소속 아이돌의 음악 작업에 참여한 그는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그의 작품임을 청자가 금방 알아챌 정도다. 최근 작업물에서는 그런 경향이 줄어든 편이나, 한때 유영진 음악의 정체성은 ‘SMP’, 즉 하이브리드 계열의 사회 비판적 성향을 띄는 곡이 많았다. 타이틀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장르는 웅장한 스트링에 기타 리프를 섞은 멜로디 라인이 특징이다. 흔히 ‘정통 SMP’라 불리는 신화의 정규 3집에 수록된 ‘All Your Dreams’가 대표적인데, 피아노 솔로로 시작해 기타를 전면에 앞세워 어두우면서도 반항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또한 동방신기의 정규 1집 타이틀곡 <TRI-ANGLE>은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 1악장을 샘플링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고전주의 시기의 클래식을 차용한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최근에는 외국 작곡가와의 협업이 많아지면서 뉴메탈 계열의 SMP가 많이 희석되었고, 그 자리를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채우고 있다.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에도 참여해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많이 썼던 것 역시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EXO의 데뷔 곡인 ‘MAMA’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작곡과 작사를 동시에 진행했던 과거와 달리 조윤경, 서지음과 같은 전문 작사가들과의 협업이 늘어난 현상의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대신 편곡 작업의 비중을 늘리면서 하나의 곡 내부에서도 장르 다각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간혹 공개되는 데모 버전 곡들을 들어보면 편곡 과정에서 상당히 복잡한 장르 혼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대중적인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덕질’을 시작한 순간부터 유영진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필자는 그의 작업물들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명곡들이 많지만, 필자가 좋아하면서도 속에 담긴 의미가 남다른 곡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플라이 투 더 스카이, <Sea of Love> (2002) – ‘감각적인’ 곡을 쓸 수 있다는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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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쓴 곡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당시 그의 작업물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곡이다. 특히 ‘바다’라는 소재를 단번에 떠올릴 수 있는 감각적인 리듬을 이 곡의 일등공신으로 꼽는 이들이 많은데, 필자는 그것 역시 좋지만 아무래도 감성을 자극하는 후렴구의 가사를 이 곡의 강점으로 꼽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후렴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For the moon by the sea
네가 떠난 바닷가에 눈물이 마를 때까지 (다 마를 때까지)
사랑한다는 건 오직 기다림뿐이었단 걸(단 걸)
난 왜 몰랐을까 (난 왜 몰랐을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S.E.S.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업물에서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시선이 강했다. 특히 이 곡이 나오기 3년 전에 발매된 H.O.T.의 ‘아이야! (I yah!)’는 같은 해에 발생한 화재 사고를 추모하는 동시에 사건 책임자들을 가감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 시기의 곡들이 거의 그런 계열이었기 때문에 필자는 ‘Sea of Love’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유영진이 만든 곡이 맞는지 다시 확인해보기도 했었다.
여담으로 이 곡의 제목이 언어유희를 사용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데, 영어 원제를 한국어로 번역한 ‘사랑의 바다’에서 ‘바다’만 한자로 바꾸면 ‘사랑해’가 된다. 2010년대 초반에 독특한 가사를 쏟아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오묘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 BoA, <Girls On Top> (2005) –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즘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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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여성상을 말하는 가사로 주목받은 보아의 정규 5집 타이틀곡으로, ‘노래가 좋다’고만 생각하던 필자가 후에 이 가사를 유영진이 썼다는 것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미니즘 담론이 아직 사회의 수면으로 올라오기 한참 전에 발매된 곡이고, 여성의 관점에서 당당하고 성숙한 현대 여성상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 가사를 썼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인걸 누구도 대신 하지 말아
(그렇게 만만하게 넘어갈 내가 아니야)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고 싶어
(그늘에 갇혀 사는 여자를 기대하지 마)
단순히 사회에 깔린 성차별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나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동시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 여성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는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더욱 폭넓은 논의가 가능하게끔 만드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많이 썼던 유영진이 이런 가사를 못 쓸 이유가 없고, 오히려 시대를 앞서 간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당당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그동안 많은 가수들이 시도했지만, 이토록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은 <Girls On Top>이 거의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관점에서도 자연스럽고 공감이 가는 가사를 쓸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큰 강점일 것이다.
* 동방신기, <Purple Line> (2008) – 세련된 SMP에 심오한 가사를 얹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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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곡을 일본 싱글로 먼저 들어서인지 지금도 한국어 버전보다는 일본 싱글 버전으로 많이 듣는 편이다. 동방신기가 오리콘 데일리 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곡으로, 동년 7월에 발매된 <どうして君を好きになってしまったんだろう?(어째서 너를 좋아하게 돼버린 걸까?)>로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까지의 곡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던 곡이다.
곡 자체는 이전부터 답습해온 유영진표 SMP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스트링의 사용 대신 전자음과 드럼 비트만을 사용했다는 것이 이 곡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전에 소개한 <Girls On Top>처럼 전자음으로 메인 멜로디 라인을 만든 후, 박자에 맞춰 비트를 가미한 것은 거의 동일하지만 <Purple Line>의 경우 동방신기가 초기에 아카펠라를 강점으로 내세웠던 것을 활용해 화음을 중층으로 쌓는 부분이 돋보인다.
가사를 읽어보면 도대체 ‘보라색 선’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는 제목에 주목해보면 의외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예로부터 보라색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귀한 색으로 여겨졌다. 이는 천연적으로 원료에서 보라색을 추출하는 것이 다른 색상에 비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보라색이 들어간 물건은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보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였기 때문에 심리학적인 측면에 봤을 때 열정과 냉정, 외향과 내향과 같이 상반되는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보라색을 중립적인 색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Purple Line’을 해석해본다면 어떤 특정한 문제 상황에 대해 화자 내면에서 벌어지는 긍정과 부정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어제와 모든 역경을 물리친 내일 사이에 놓인 오늘, 즉 경계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련을 반복할 수록 내가 아닌 날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제껏 나를 넘어선 내가 내겐 없었지
특히 이 가사를 봤을 때 위의 해석은 더 설득력을 얻게 되는데, 현재의 고난을 겪고 있는 화자는 ‘나’를 넘어서기 위해 기꺼이 시련으로 야기된 문제 상황을 받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후렴구에 등장하는 ‘누구도 걸어보지 못했던 This way’라는 표현에서 ‘Purple Line’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길을 걷거나, 혹은 그동안의 삶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길인 ‘Purple Line’으로 걷고 있다는 식으로의 해석이 가능하기에 화자의 변화와 관련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NCT U, <WITHOUT YOU> (2016) – 변화 속에서도 여전한 고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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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P가 본격적으로 NCT의 머리글자 중 하나인 ‘Neo’를 따라가기 시작한 기점이 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네오함의 결정체를 보여주기에는 퓨처 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일곱 번째 감각 (The 7th Sence)’이 더 적합할 수 있으나, 유영진의 가사 스타일 중 하나인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희망’을 잘 표현한 것은 바로 이 곡이다.
내 손을 잡아 원을 그려 이 만큼 나눠 가진 거잖아 내 온 마음이 네 곁에 네 꿈이 내 곁에 산다는 거 견디는 거 함께라면 조금 더 행복해져 끝없이 연결돼 다시 can’t live without you
1절 가사를 살펴보면 ‘외로워 지친 누군가의 세상을 본다’거나 ‘우린 외톨이로 태어났다’는,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혼자’라는 인식을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후렴에서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고,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는 자아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의 세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화합할 때 행복을 말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유영진 방식의 작법 스타일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초창기 유영진의 곡 스타일이 어둡고 비장한 분위기의 락 계열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20년 후의 그의 곡 역시 락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거기에 EDM과 (D Major) 장조로 곡을 이끌어 나가 밝은 분위기가 더해졌다. 이는 앞서 설명한 스타일의 변화와 상통하는데, 최근에는 잘 드러내지 않던 ‘보컬의 극대화’가 오랜만에 나온 곡이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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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에 참여한 태일, 도영, 재현(중국어 버전에는 쿤이 참여했다.)은 각자의 보컬 색이 뚜렷한 편이다. 크게 보면 청량한 느낌의 태일과 도영, 그리고 따뜻한 느낌의 재현으로 나눌 수 있지만, 도영이 태일보다 좀 더 맑고 허스키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모두 그룹에서 메인보컬 포지션을 맡고 있는 만큼 실력이 출중한데, 이를 잘 활용해 음악 안에서 모두가 돋보일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곡의 특징이자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음악가가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꾸준히 이어 나가면서도 그 속에서 변화를 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영진 역시 2010년대 초반 실험적인 멜로디와 가사를 선보이면서 부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완성도 높은 곡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K-POP이라는 장르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도 K-POP의 트렌드 세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음악적인 발전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엔 또 어떤 곡으로 필자의 심장을 뛰게 만들지 기대가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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