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EXID의 <위아래>, 씨스타의 <Touch My Body>, AOA의 <단발머리>, 걸스데이의 <Something>가 차트를 장악했던 시기였다. 섹시 컨셉이라는 레드 오션을 피하고자 당시 신인 걸그룹 런칭을 준비하던 기획사들은 S.E.S와 핑클, 소녀시대와 에이핑크의 계승을 목표로 ‘소녀’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러블리즈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데뷔한 걸그룹 중 한 팀이다. 동시에 대중들에게 러블리즈라는 이름을 각인한 곡들이 <Ah-Choo>와 <Destiny (나의 지구)>이다 보니 러블리즈 하면 ‘아련청순’으로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케이팝을 좀 들어봤으면 알 수 있다시피 청순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에 묶을 수는 있을지라도, 곡, 가사, 뮤직비디오와 같은 음악적인 방면, 그리고 팬과의 소통, 예능에서의 활약과 같은 음악 외적인 부분이 합산되어 걸그룹들은 각자 그룹만의 색깔을 덧칠해간다.
러블리즈는 ‘짝사랑 전문 걸그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때 데뷔한 러블리즈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지금, 우리>를 통해 탈(脫)짝사랑에 성공하였고, 이 때문에 당시 가사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경험이 있다. 물론 그 이후 계속된 짝사랑 서사와 뮤직비디오 속 꿈같은 환상적인 연출로 인해 ‘<지금, 우리>의 상황은 현실이 아닌 화자의 꿈이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손을 붙잡고 “언니, 그 XX 좋아하지 마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러블리즈는 유독 짝사랑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들은 ‘남들과 같은’ 뻔한 짝사랑을 다루지 않는다. 러블리즈는 짝사랑이라는 다분히 클리셰적인 소재를 어떻게 러블리즈만의 차별화된 내러티브로 끌고 갈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서브 캐릭터의 메인 캐릭터화(化)
일반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속에 짝사랑을 도맡아 하는 인물은 서브 역할로, 메인 캐릭터의 사랑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반면 러블리즈가 하는 짝사랑은 부수적인 서브 플롯으로 격하되거나, 제 3자로서 관찰자 시점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오히려 철저히 러블리즈의 시선과 감정선 안에서 곡이 전개된다. 마치 메인 플롯 밖에 위치한 캐릭터의 서사를 집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극적인 감정을 고조시키는 전략처럼 보인다.
이과 감성으로 유명한 <Destiny (나의 지구)>를 살펴보자. 러블리즈가 좋아하는 상대방은 또 다른 사람을 짝사랑한다. 때문에 청자에게 러블리즈는 서브 역할에 불과하며, 상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맴돌기만 해야 하는 존재로 머물게 된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진부한 전개로, 듣는 이는 화자가 이내 마음을 접고 추억에 묻어둔다는 뻔한 서사가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러블리즈는 청자에게 ‘떠날 수 없고 넌 내 운명이자 내 하루의 중심’이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Mnet에서 방영한 ‘퀸덤’에서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Cameo>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Cameo>의 가사만 봤을 때, 화자는 ‘특별 출연한 유명인’을 뜻하는 카메오보다 엑스트라에 가깝다. 이를 보면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헷갈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엑스트라일지라도 화자에게 있어서는 본인이 극을 이끌고 가는 핵심 캐릭터이기에 자신을 카메오라는 특별한 존재로 승격될 수 있는 것이다. 발랄한 멜로디와는 상반되는 다소 서글픈 가사가 조성하는 이질적인 느낌은 듣는 이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다. 실제 드라마였으면 10분도 채 안 될 짧은 시간이 주어졌을 서브 캐릭터의 감정선을 길게 늘여 재조명한다는 점 덕분에 많은 이들이 웹툰이자 인기 드라마였던 ‘어쩌다 발견한 하루’가 연상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유기적으로 연결된 음악세계
러블리즈의 앨범의 특징은 ‘소녀 3부작’, ‘사랑 3부작’으로 연작물로 구성하여 하나의 서사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3부작 시리즈가 아니다. 비록 시리즈는 아니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는 듯한 곡들을 찾아볼 수 있다. <놀이공원>과 <백일몽> 두 곡은 모두 러블리즈의 상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밤새도록 돌아가는 관람차’로 유명한 <놀이공원>의 가사 속 놀이공원은 화자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으로,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청자와의 기억에 대해 노래한다. 밤새도록 돌아가는 관람차와 세상 가장 달콤했던 솜사탕, 그리고 청자는 모두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e.one이 참여하여 입소문을 탄 <백일몽>은 <놀이공원>과 같이 화자의 상상 속에 살고 있는 청자에 대한 곡이다. 청자는 알지 못하겠지만, 화자가 만든 세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에서 살고 있다며 상상 속에서라도 만나기를 기원한다. 다른 점은 데뷔 앨범에 수록된 <놀이공원>은 이별은 없었던 일로 하고 마냥 설레고 행복해하지만, <백일몽>에서는 –네가 있는 나의 상상이 너무 당연해졌어 매일 밤 나를 달래봐도 그래 차가운 눈물만 나와- 라며 청자의 곁에 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놀이공원>의 화자와는 다른 감정선을 보여진다.
<마음(*취급주의)>와 <찾아가세요> 두 곡 모두 자신의 사랑을 우편물로 비유했다. <마음(*취급주의)>는 꼬깃꼬깃 접은 고백과 자신의 마음을 조심히 담아 받는 사람 자리에 너의 이름을 쓰고 이젠 전하겠다고 노래한다. 서툴고 풋풋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곡이기 때문에 통통 튀는 귀여운 곡이다.
반면 <찾아가세요>는 영제마저 분실물 센터를 뜻하는 ‘Lost N Found’로, <마음(*취급주의)>는 사랑을 수신자에게 보낼 우편물에 비유했다면, <찾아가세요>는 수신자에게 닿지 못한 우편물에 비유했다. 러블리즈는 장난과 진심이 섞인 "네가 좋다"는 말, 예쁘게 쓴 글씨와 신경 쓴 말씨라는 간접적인 시그널로 청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청자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서 미처 청자에게 닿지 않았던 진심을 이제 가져가달라고 말하는 곡이다. -널 사랑해 포장해둔 그때 그대로 주인 없이 낡아서 먼지만 쌓여가잖아- 의 가사는 러블리즈의 마음을 몰라준 얼굴 모를 청자에 대한 원망을 최고조로 도달하게 할 정도의 명가사라고 생각한다.
<찾아가세요>는 1Piece(윤상이 이끄는 작곡•프로듀싱팀)에 소속된 스페이스카우보이가 작업한 곡으로, 1Piece의 특징인 메이저와 마이너를 넘나드는 변조와 후렴구를 가득 메우는 스트링이 애절한 마음을 배가시킨다. 해당 네 곡이 연관성이 있다는 공식적인 의견은 없지만, 러블리즈의 세계관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사가 어떻게 변화됐는지 비교해보는 것은 듣는 이가 즐길 수 있는 숨겨진 미시적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멜로 속 숨어있는 호러
울림 엔터테인먼트는 러블리즈를 통해 ‘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소녀’의 이미지를 꾸준히 제시해왔다. 단편적으로 보면 추억 속에 있는 허상의 첫사랑 이미지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몇몇 곡들은 청순한 첫인상을 서늘하게 마무리하여 듣는 이들로부터 궁금증을 유발한다. <Destiny (나의지구)>가 수록된 미니앨범 2집 ≪A New Trilogy≫의 프롤로그 필름에 BGM으로 깔린 <인형>은 ‘멜로 속 호러’라는 말을 가장 잘 드러낸다. 곡 자체는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낮잠을 자는 동안 들릴 법한 왈츠풍의 잔잔한 음악이다.
제목과 같이 인형의 관점에서 쓰인 곡으로, 일기예보의 <인형의 꿈>, 이지훈&신혜성의 <인형>, 그리고 최근 발매된 에이프릴의 <인형>과 같이 ‘멀리서 바라보며 언젠가 날 바라봐 주길 바라는 슬픈 가사’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물론 러블리즈의 <인형> 또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내용은 맞다. 그러나 위에 나열한 곡들은 ‘나’의 순애보적인 사랑을 인형에 빗대었다면, 러블리즈 <인형>의 –알아요 그 앨 닮은 내 모습 TV 속에 춤추는 그 앨 난 멈춰 선 채 바라만 보죠-의 가사는 사전적인 의미의 인형, 심지어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던 아이돌 솜 인형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외에도 <비밀여행>은 인트로부터 심전도 모니터 기계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곳곳에 My lies라는 가사가 계속 반복되며, -저 멀리 저 멀리 아무도 없는 곳이 좋아 아득히 아득히 떠나자 누구도 몰라보게- 등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함께 비밀여행을 떠나자고 한다. 아이돌 음악에서 쉽게 듣기 힘든 효과음, 통통 튀는 분위기에서 마지막 브릿지에서 급변하는 곡의 분위기, 그리고 의미심장한 가사는 듣는 이들의 상상력을 가동하게 만들며 도대체 화자는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일까 추리하게 된다.
사실 두 곡의 공식적인 곡 설명은 호러와는 거리가 멀다. 곡 자체도 가볍게 들으면 러블리즈의 사랑스러움이 잘 묻어난 곡일 뿐이다. 앞서 서술된 네티즌의 의미심장한 해석이 실제 작사가의 의도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의 음악을 가지고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어 볼 기회를 준다. 회사에서 제시한 멜로에서 호러의 서사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한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퀸덤>에서 멤버 예인이 ‘친절한 금자씨’ OST로 보여준 퍼포먼스로 인해 이후 러블리즈의 본격적인 청순 호러에 대한 기대치와 신뢰도는 더 높아졌다.
2014년, <Candy Jelly Love>라는 곡과 함께 교복과 앳된 얼굴로 데뷔한 러블리즈는 어느덧 데뷔 6주년을 맞이할 아이돌로 성장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짝사랑 전문 걸그룹으로 정평이 나있었던 것은 맞으나, 한결같이 일방향적인 사랑만 노래한 것은 아니다. 짝사랑이라는 컨셉에서 그치지 않고, 서브의 메인화, 유기성, 멜로 속 호러 등 이를 기반으로 깊이 있는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리고 <그날의 너>에서는 아픈 이별의 감정을 따뜻한 추억으로 승화시키며 앨범명처럼 ‘치유’의 과정을 겪기도 하고,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우리>에선 아름다웠던 둘의 모습을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그리고 ‘퀸덤’에서 선보인 <Moonlight>는 사랑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찾겠다고 선전포고한다. 이처럼 러블리즈는 가사, 음악, 서사, 스타일링 등 틀 안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주며 다방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러블리즈는 필자에게 언제나 ‘믿고 듣는 러블리즈’였기에, 2020년에 선보일 6년차의 러블리즈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을 키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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