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서울에 첫눈이 내린 후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아마 모두 목도리와 파카를 부랴부랴 꺼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찾아오는 겨울 추위와 함께 한 해를 정리할 시점이 다가왔다. 독자들은 이번 2020년이 어떤 해로 기억될 것 같은가? 당연하겠지만 ‘코로나’라는 단어를 빼기 힘들 것이다. 코와 입을 어색하게 감싸던 마스크에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하루에 천 명씩 발생하는 확진자 숫자를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한 일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를 제외하고 올해 가장 큰 일은 무엇이었을까? 필자에게 2020년은 이상 기후가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던 해로써 기억될 것 같다. 특히 여름에 우리나라 전역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집중 호우는 각 지역의 최고 강수량 기록을 경신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인적, 물적 피해를 낳았다. 또한, 그다지 더위를 느낄 수 없었던 여름과 함께 평년에 비해 한 달 가까이 늦은 첫눈은 지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했다.
자연재해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일 아침 예보를 확인하고 그날의 옷차림을 결정하며, 집 밖을 나오면 ‘더워!’ 또는 ‘추워!’ 소리를 내며 날씨를 느낀다. 매 순간 생각하며 살아가진 않지만, 기상이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다양한 날씨를 표현한 아이돌 노래를 살펴보고, 가사나 멜로디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비유를 생각해낼 수 있을까...!’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인피니트, <태풍>
끝내지 못한 이별 뒤 / 이별과 이별 / 내게 남겨진 인연과 인연
너를 벗어나려 해도 / 멀리 도망치려 해도 / 또 휩쓸려 네게로
2016년에 발매된 인피니트의 <태풍>. 영문 제목은 ‘The Eye’로, 태풍에서 가장 고요한 ‘태풍의 눈’을 소재로 했다. 태풍이 상륙하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나무조차 날려버릴 정도의 강한 바람이 분다. 걷는 것은 물론 앞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하기도 힘들어진다. 이 곡의 화자에게 이별 상황은 강한 태풍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겨우 바람이 잔잔하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곳으로 벗어났지만, 그곳은 태풍의 바깥이 아닌 태풍의 중심이었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줄 알았던 화자의 마음은 이내 휩쓸려버린다는 내용의 가사가 매력적이고 심오하게 다가온다.
태풍은 아주 강한 저기압으로, 지표면 근처의 공기를 상층으로 힘차게 빨아올린다. 하지만 지상의 공기가 모조리 올라가 버린다면 태풍이 지나가는 곳의 생명체는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분명 어딘가에서는 공기가 내려와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많이 모여 무거워진 상층의 공기는 태풍의 구석구석에서 하강한다. 하강 기류는 중심부에서 가장 강하여 해가 쨍쨍하고 바람이 잠잠한, 마치 고기압과 같은 날씨를 만들어낸다. 위성 영상으로 보면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태풍의 눈에서는 하강 기류가 우세하게 나타나지만, 고기압은 아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작은 태풍을 제외하고는 맑은 날씨를 보기는 드물다. 구름이 없어도 수증기로 인해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태풍은 보통 시속 35~40km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반지름이 약 50km 정도인 태풍의 눈은 1~2시간이면 지나가 버린다. <태풍>에 등장한 화자가 있던 태풍의 중심은 금방 폭풍우 속, 즉 그녀에 대한 기억 속으로 다시 휩쓸리게 된다. 직경이 최대 1,500k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태풍 속을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 연인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피니트의 <태풍>은 이별 후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을 자연 현상에 잘 빗댄 노래다. 더불어 이 곡의 가사는 전부 한글로 되어 있어 한글 특유의 어감을 느끼기에도 좋다. 노래를 들으며 태풍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소위 ‘찰떡’으로 맞아떨어지는 보조관념을 고른 전간디 작사가를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 밖에 2020년 7월에 발매된 여자친구의 <눈의 시간>이라는 노래에는 태풍의 눈으로 어떻게든 들어가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강력한 줄로만 알았던 태풍의 ‘온순한 면’을 보여줬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EXO-K, <Thunder>
넌 번개처럼 잠깐 빛났다 / 잠시 세상을 밝혔다
온 세상을 마치 내 것처럼 / 나에게 보여주곤 떠났다
천둥처럼 늦었다 나는 이제야 널 찾는다
Boom boom boom boom boom
뒤늦게야 소리 내 널 부른다
EXO-K의 두 번째 미니앨범 <중독 (Overdose)>의 3번 트랙에는 <Thunder>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 중에는 ‘시간의 벽을 넘어 너를 찾아간다 / 지금은 달라도 시작은 같았다 / 아직 돌아갈 수 있다고 믿어 / 지금 하나둘 초를 세며 우리 거릴 잰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 가사처럼 아마 독자들도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울릴 때까지의 시간을 마음속으로 세어 거리를 계산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1초에 30만 km를 진행하여 어디에 있든 거의 동시에 도달하는 빛과 달리, 소리의 속력은 초속 340m이므로 수 km 떨어진 지역에 천둥소리가 닿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번개는 두꺼운 구름의 상부와 지표면에 (+) 전하가, 구름의 하부에 (-) 전하가 축적되다가 전압이 커질 때 방전이 일어나며 가시광선을 내뿜는 현상을 말한다. 번개가 치는 순간 번개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30,000℃를 돌파하며, 고온의 공기가 급격히 부피가 팽창하는 소리는 천둥이 된다. 전하가 구름의 하부에 점점 쌓이게 되면 지표에 있는 물체도 영향을 받는다. 특히 정전기에 민감한 머리카락이 갑자기 과할 정도로 하늘로 선다면, 몇 분 이내로 번개가 칠 가능성이 있으므로 빠르게 대피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고를 피해야 한다.
노래 속에서 화자는 번개로 비유된 화자의 전 연인을 뒤늦게 잡아보려 하지만, 실제로 번개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CG(Cloud to Ground)형, 즉 지표면까지 닿아 벼락 또는 낙뢰가 되는 번개는 전체의 20%에 불과하며, CC(Cloud to Cloud; 구름에서 구름으로 치는 번개)형, IC(In-Cloud; 구름 속에서 치는 번개)형, CA(Cloud to Air; 구름에서 공기 중으로 치는 번개)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름철에 분명 번개가 없었는데, 별안간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곧 장대비가 쏟아졌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될 듯하다. 번개는 땅에서 하늘로 향해 치거나, 구름 상부의 아주 높은 고도에서 치고 사라지기도 한다. ‘반짝 짧게 빛났었던 / 행복 속에 취해 저 기억의 빛에 / 잠깐 눈이 멀었’던 화자는 연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필자는 집 위로 벼락이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번개가 머리 바로 위의 하늘에서 생기면 천둥도 동시에 도착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이 반짝함과 동시에 고막을 찢어놓는 큰 소리가 느껴지고, 집안의 전등이 일제히 나갔던 그 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사건 이후 필자에게는 천둥과 번개를 무서워하는 ‘뇌 공포증(雷恐怖症; astraphobia)’이 생겼다. 하지만 엑소의 <Thunder>는 가사와 멜로디에 중독될까 봐 두려운 곡이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상체만 움직이는 퍼포먼스는 최소한의 동작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잠깐 빛났다가’ ‘떠나’버리는 번개와 찰나의 빛을 찾기 위해 ‘뒤늦게야 소리 내’는 천둥을 각각 연인과 화자 자신에 비유한 가사가 와 닿는 노래다. 그 밖에도 FT아일랜드의 <천둥> 역시 천둥과 번개를 소재로 한 노래이니 같이 들어보면 좋겠다.
I.O.I, <소나기>
그냥 스쳐 지나가는 / 소나기죠 그런 감정이죠
나 정말 그대를 만나 / 행복했던 많은 추억들을 / 빗물에 잃지 않아요
<소나기>라는 제목을 들으면 누구의 노래가 생각나는가? 인피니트, 오마이걸 등 아이돌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부활, 윤하, 김장훈의 노래가 생각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소나기>하면 아이오아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이오아이의 결성부터 9개월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별을 고해야 할 때, 가수와 팬이 서로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이 노래에 가득 담았다.
곡 설명에 따르면 이 노래에는 금방 내렸다 그치는 소나기처럼 지금은 슬프지만, 곧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밝은 희망이 담겨 있다. 실제로 여름에는 낮 동안 데워진 지표에서 국지적으로 강한 상승 기류가 생기며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강하게 발달하며 소나기를 뿌린다. 하루보다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지는 것이다. 강수 시간도 짧아서 길어야 20분 정도 굵은 비가 쏟아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이 보인다. ‘너무 차디찼던 눈물이 / 따뜻한 눈물이 되어 / 흘러내리겠’지만, 태풍이나 장마가 아니라, ‘금방 지나갈 소나기’인 것이다.
소나기는 대기가 불안정한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여기서 ‘불안정’이라는 말은 높은 고도에 찬 공기가, 낮은 고도에 따뜻한 공기가 있어 서로 아래/위로 이동하려고 하며 공기가 섞이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대기가 불안정해야 낮은 곳에 있던 공기가 높이 올라가며 두꺼운 구름, 즉 적란운을 만들어내어 강한 비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나기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양한 종류의 위성 영상과 각종 지수를 통해 소나기 예보의 정확도를 높이려고 하지만, 같은 조건의 대기 상태에서도 작은 차이로 인해 소나기의 발생 여부가 갈리게 된다. 마치 같은 열을 옥수수 알갱이들에 공급해주어도 팝콘이 되는 시점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동네 단위의 소나기 예보는 불가능하며, 퍼센트 확률을 사용하여 넓은 범위에 걸쳐 예보한다. 따라서 아침에 소나기 예보를 본 날에는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에 대비하여 작은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그룹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아이오아이. 비록 그룹은 해체되었지만, 멤버들은 지금도 예능과 드라마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래가 남아 있어 언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세븐틴의 우지가 쓴 한글 가사와 멤버 한명 한명의 극대화된 음색이 어우러져, 아이오아이가 노래하는 소나기는 옷이 다 젖어버려 불편해지는 ‘장대비’가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단비’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가 앞으로도 팬들의 행복했던 추억을 잃지 않게 해주길 바란다.
이상으로 날씨를 소재로 한 아이돌 노래를 살펴보았다. 기상 현상의 과학적 원리가 대중가요의 가사로 쓰인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어떤 노래를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멜로디가 귀에 들어오고 퍼포먼스가 눈에 띄겠지만, 계속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가사를 읽게 되고, 나아가 가사를 해석하고 싶어진다. 이 글이 노래의 해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감정을 자연 현상에 빗댄 참신한 아이돌 노래를 신곡으로 종종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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